이화여자대학교 EWHA WOMANS UNIVERSITY이화여자대학교 EWHA WOMANS UNIVERSITY

해외봉사

2011 겨울 해외교육봉사_베트남_박윤미

  • 작성일 : 2013-03-29
  • 조회수 : 750
  • 작성자 : 사회봉사센터

이화봉사단, 베트남에서의 9 10일간의 눈부셨던 봉사 이야기

 

인문과학부 11학번 박윤미

 

 내가 이때까지 했던 봉사활동은 누군가에 의해 지시받고, 나는 그냥 복종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봉사였다. 고등학교 때도 선생님을 따라 봉사를 다녔고 대학에 와서도 동아리 선배에게 이끌려 봉사활동을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화봉사단에서 가는 해외교육봉사는 달랐다.  10월 초에 이화봉사단에 뽑혀서 기말고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나에게 맡겨진 임무는 공연팀 준비뿐이었다. 그런데 이같이 사소한 일도 귀찮아서 리더언니의 문자를 잘 따르지 않았던 적이 많다. 또 바쁜 일상에서 이화봉사단을 준비하는 것이 무척 버겁게 느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러한 생각이 무척 이기적인 마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깊은 반성을 하게 된다. 나만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데 나만 바쁘다는 핑계로 사전봉사준비를 소홀히 한 점이 팀원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본격적이 준비는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시작했다. 2주 동안 봉사 준비를 하는데, 춤 연습도 하고 우리가 기획한 프로그램도 미리 해보는 등 완벽한 봉사를 위한 준비였다. 준비 기간 첫 주에는 해외봉사 준비로 하루 종일 학교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억울했고 이렇게까지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매일같이 학교에 나와서 춤연습과 그 외에 봉사준비를 하다 보니 이 기간에는 나에게 맡겨진 봉사준비가 최우선이라는 것을 깨닫고 열심히 하게 되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교육봉사야 가서 하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사전준비를 철저하게 하나 불만도 많았지만 팀원 모두 열심히 사전준비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나의 생각이 단순한 투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주간의 사전준비가 끝나고 13, ‘이화봉사단 베트남 교육봉사라는 이름으로 베트남이 호치민으로 떠나게 되었다. 5시간의 비행 끝에 호치민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겨울인 한국에 반해 높은 습도를 자랑한 호치민의 날씨에 숨이 막혔다. 공산국가라서 폐쇄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베트남이 생각보다 개발되었고 사람들도 공산주의라고 특별히 다른 점은 없어보였다. 그렇게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 돼서야 호치민의 한 호텔에 짐을 풀 수 있었다.

  밤늦게 호치민에 도착했지만 우리의 아침은 일찍 시작되었다. 겨울방학의 아침이라기엔 무척 이른 6시에 일어나서 씻고 호텔 조식을 먹고 우리가 10일 동안 지내게 될따오 단이라는 센터로 향했다. 전형적인 베트남 식 건물이여서 폭은 좁고 위로 높이 올라가있었다. 10일 동안 매일같이 4층짜리 건물을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무척 힘들었다. 첫날이라서 오전에는 한국어학과 통역사분들과 센터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눴다. 무척 어색한 시간이었지만 통역사 분들은 나이대가 비슷해서 공감대가 쉽게 형성되어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생각보다 아이들이 일찍 도착하여 1층으로 내려가 아이들은 맞았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언어가 달라서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해야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아이들이 우리에게 낯가림을 하지 않고 먼저 다가와서 인사해주고 안겨서 우리도 어렵지 않게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센터의 아이들을 보기 전에 집안 사정이 어려운 아이들이라서 우리를 경계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아이들은 무척 밝았다. 밝은 모습은 좋았지만 도를 지나쳐 몇몇 아이들은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가 한국에서 봉사하는 아이들이 생각났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봉사인데 처음에는 센터의 아이들처럼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지만 우리랑 지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폭력적인 성향을 얕아졌다. 그래서 센터의 아이들도 우리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점차 폭력적인 성향이 줄어들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첫 날이라 정신없고 혼란스러웠다. 항상 듣기를 봉사란 주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는 데 이렇게 혼란스러운 틈에서 무엇을 주어야 하고 무엇을 배워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정신없이 오전이 지나가고 오후에는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10명씩 3개의 반으로 나눠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첫날은 베트남에서의 날씨가 적응되기 전에 정신없이 아이들과 놀다보니 끝나버렸다. 밥을 먹고 호텔에 들어오면서 과연 내가 이 생활을 남은 9일 동안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이제 와서 느끼는 거지만 첫날에 겁을 먹었던 것 같다. 팀원들과 선생님들과 피드백을 하다 보니 점차 센터 생활의 어려운 점이 극복되었다. 물론 빡빡한 스케줄이었지만 첫 날 이후에는 즐기면서 봉사를 할 수 있었다.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였다.

 그렇게 다소 힘들고 지치지만 아이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하루하루 봉사를 나갔다. 처음에는 말도 안 통하고 우리의 말은 잘 듣지도 않던 아이들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순수하고 착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정을 준만큼 그들도 우리에게 정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쉽게 정이 안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봉사하고 담담하게 한국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쉽게 정이 들어버렸다.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좀 더 오래 호치민이 남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아이들과 부딪치면서 생활하다보니 잊고 있던선생님이라는 꿈이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만큼 아이들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나에게 큰 존재가 되어버렸다. 센터에서의 마지막 수업이었던 오전반 수업.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잘 나오지 않았던 남자애들 3명이 오랜만에 센터에 왔다. 한 명 빼고 우리 반 아이들과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무척 고마웠다. 11시반에 학교를 가야한다며 11시부터 시계를 보며 빨리 보내달라던 아이들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이해한 것처럼 11시 반이 넘어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들 옆에서 점심을 먹으라며 밥도 챙겨주고 그 위에 반찬을 올려주는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버렸다. 아이들이 우리 봉사단을 그냥 지나쳐가는 봉사자들이라고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우리의 존재가 생각보다 커졌다는 생각이 너무 고맙고 슬펐다.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볼 수 없는 아이들이라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어린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울지 말라면서 달래는 모습이 너무 어른스러웠고 의젓해 보였다. 처음에는 말도 잘 듣지 않던 아이들이 이제는 우는 봉사자들을 달랠 정도로 우리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웠다.

  앞 서 말했듯이 해외교육봉사를 다녀와서 아이들에게도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지만 내가 가장 감동받은 것은 팀원들이다. 20명의 여대생이 작은 불화 하나 없이 약 한 달간 붙어 지냈다. 그들에게도 너무 많은 정이 들었다. 또 팀원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19명의 팀원들에게 배운 점을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지만 내가 다양한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이처럼 서로를 배려하는 구성원은 없었다는 점은 꼭 말하고 싶다. 물론 아직 나는 갓 1학년을 마친 학생으로서 다양한 경험도 없지만 이곳에서 리더십이나 배려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서로 각기 다른 전공을 가지고 공통점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봉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봉사를 통해 주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번 해외봉사를 통해 나는 정말 얻어가는 것이 많다. 다른 사람들 보다 얻어가는 것이 많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1학년의 마지막에 정말 좋은 사람들과 좋은 경험을 얻고 2학년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무척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