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EWHA WOMANS UNIVERSITY이화여자대학교 EWHA WOMANS UNIVERSITY

해외봉사

2011 여름 해외교육봉사_캄보디아_유미진

  • 작성일 : 2013-03-29
  • 조회수 : 667
  • 작성자 : 사회봉사센터

캄보디아, 이 매력적인 나라야.

 

영어교육과 11학번 유미진

캄보디아로 가는 비행기 안. 나는 하늘 위에서 보는 석양의 씨뻘건 빛에 매료되었었다. 짙은 남색의 하늘과 구름이 맞닿은 곳에 자리한 그 씨뻘겋던 빛을 보며 생동감’, ‘강렬함등의 단어를 떠올렸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캄보디아에서 하게 될 2주간의 봉사 활동이 딱 이 색깔만큼의 열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내려 날 처음으로 반겨주었던 건 엄청난 습기와 숨 막히는 더위였다. 한국에서부터 품고 갔던 설렘과 기대감이 약간의 두려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첫째 날은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으로 지나갔다.

둘째 날. 본격 적인 활동을 위해 우리는 파란 봉사단 티를 맞춰 입고 버스에 올랐다. 시원한 버스 안에 앉으니 그제야 낯선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그만 오토바이에 세 사람이 꾸깃꾸깃 앉아 가던 사람들, 상의 따위는 벗어 던진 채 바지만 입고 돌아다니던 아저씨들, 인도에 그냥 둘러 앉아 술판을 벌이던 동네 주민들. 내가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봤듯 그들도 우리를 참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었다. 이국적인 정취의 프놈펜 시내를 지나 우리는 또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야 했다.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울퉁불퉁한 흙길 끝에 이화스랑 초등학교가 엘도라도처럼 있었다. 그 곳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어머니의 품 같다는 것이었다. 푸른 산이 이화스랑을 품고 있었다. 드넓은 잔디, 그 위를 자유롭게 거니는 하얀 소들, 낯선 사람인 우리를 아름다운 미소로 반기던 동네 아이들을 보며 평화로움을 느꼈다.

아이들을 처음 만나던 날. 아이들은 낯선 곳에서 온 선생님들을 경계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나이에 비해 작고 말랐었다. 각자의 명찰을 만들고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 아이들은 취미가 빨래하기, 소 몰기, 부모님 농사일 도와드리기와 같은 것들 이었다. 시간이 날 때 부모님의 일손을 덜어 드린다는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본인들의 일상에 치여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해 줄 시간이 부족한 부모님들을 대신해 그에 버금가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쁜 부모님과 부끄러움 많은 현지 선생님을 대신해 많이 안아줬다.

넷째 날부터는 본격적인 프로그램들을 진행했다. 한국에서 준비해 간 프로그램들을 잘 따라주었고, 하루하루 마음을 여는 듯 했다. 하지만 이 나라의 더위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는 1110분부터 해가 지는 5시까지 우리는 병든 닭처럼 지쳐 쓰러져 있었다. 부지런한 몇몇은 빨래를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행정동 화장실과 숙소 방 사이 시멘트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누워있기만 해도 땀이 뻘뻘 났다. 캄보디아라는 나라 전체가 습식 사우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간은 다시 생각해도 몸서리쳐 지지만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이 원시의 생활을 했던 그 때는 참 행복하다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실제로 행복했다. 더위에 지쳐 땀에 절어있을 때는 작은 바람이 불어주면 감사했고, 스콜이 오면 참 행복했다. 스콜이 많이 오면 그 날은 학교 옆 빗물 샤워장에서 씻을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빗물로 샤워를 하고 2층 야외 식탁으로 가 바람을 느끼며 망고스틴을 먹으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참 소소한 것에 행복해했었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아이들의 이름도 많이 외웠고 또 많이 친해졌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그전엔 피하던 아이들이 이제 밝게 웃어주기 시작했고, 먼저 와서 안기기도 했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수업 시간은 또 왜 이리 금방 가는지. 낮 시간은 또 왜 이리 더디 가는지. 매일 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보냈었다.

2주차 막바지에 접어들면서는 이제 곧 아이들과 헤어지겠다는 걱정과 슬픔이 컸다. 작별인사를 하던 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좀더 잘해줄걸 이라는 말을 하며 수민 언니가 울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며 나도 억누르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었다. 작별 인사는커녕 준비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울기만 했다. 눈물을 멈추려고 애쓰고 있는데 현지 선생님이 뭐라 뭐라 캄보디아 말로 아이들에게 말씀하시더니 별안간 내가 예뻐했던 롱이응이 손을 들고 일어났다. 롱이응은 지난 2주간 우리가 와주어서 고마웠다며 눈물을 보였다. 울음을 그치려던 나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그렇게 바보처럼 울던 우리를 향해 아이들은 어꼰 네악끄루,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라며 합장을 했다. 행정동으로 돌아와 뒷정리를 하며 이화해외봉사단 모두는 말이 없었다. 이별은 항상 힘들고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이 되면 정든 아이들을 한 해 마다 보내고 또 새로 맞이해야 할 텐데……. 회자정리와 거자필반 이라는 두 개의 단어의 연관성을 생각하며 이화 스랑에 반드시 다시 방문하리라 다짐했다.

이화 스랑을 진짜로 떠나던 날. 아이들은 모두 학교 밖으로 나와 우리를 배웅해주었다. 배웅 해주는 아이들 맨 앞에 우리 조였던 롱이응과 소반나롱이 있었다. 롱이응은 자기가 끼고 있던 반지를 선물해주었고 소반나롱은 이름 모를 노란 꽃 그림을 주었다. 분홍색 펜으로 예쁘게 소반나롱이라고 적어서 말이다. 절대 다시 울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은 아이들이 주는 선물을 받은 순간 또다시 깨져버렸다. 마지막까지 그렇게 아이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서 미안했다. 이 아이들을 항상 내 가슴속 한편에 담아두리라 너희들의 행복을 항상 빌어주리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오니 캄보디아에서의 그 시간들이 참 그립고 아련하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새벽 5시부터 6, 2층 야외 식탁에 앉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이것저것 적고 음악을 듣던 그 시간. 저녁 먹고 누워 한참 동안 떠들다 지겨워져 시계를 보면 항상 840분이어서 매번 소름 돋아 했던 밤들.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 말라빠진 소,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 감상문을 쓰기 위해 다시 돌이켜보니 참 소중하고 귀한 시간들이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보람된 시간이었다고 자부한다. 이화 해외봉사단원들과 지도교수님, 인솔 직원 선생님 다들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알게 되고 이들과 함께여서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