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EWHA WOMANS UNIVERSITY이화여자대학교 EWHA WOMANS UNIVERSITY

해외봉사

2011 여름 해외교육봉사_캄보디아_이슬

  • 작성일 : 2013-03-29
  • 조회수 : 681
  • 작성자 : 사회봉사센터

어꼰 네악끄루

 

환경공학과 10학번 이슬

 

으아...!” 캄보디아 프놈펜 국제공항을 빠져나왔을 때 나의 첫 마디였다. 손을 휘저으면 물이 손에 잡힐 것 같은 축축한 습기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캄보디아의 더위가 우리를 반겨줬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달려 도착한 깜뽕스프라는 작은 시골마을. 구불구불 울퉁불퉁한 길을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캄보디아의 맑은 하늘과 푸른 산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학교가 나온다. 이화스랑초등학교 그곳에서의 잊지 못 할 우리의 소중했던 1213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캄보디아의 햇살처럼 뜨거워진다.

이화해외봉사단 단원발표가 나고 우리는 어색했던 첫 만남을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함께 봉사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기획팀이어서 아이들을 가르칠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우리와 함께할 2주라는 시간을 이 아이들을 위해 어떻게 쓸지, 아이들에게 어떤 소중한 배움을 줄 수 있는지 시험기간에 도 틈틈이 모여서 열심히 회의를 하고 수정하고 보완하기를 반복했다. 방학 후에는 본격적인 봉사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에겐 준비기간으로 2주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보통 해외봉사 준비 기간에 비해 짧은 기간이었다. 매일매일 모여서 회의를 하고 공연연습을 했다.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렸더니 공연을 다섯 개나 하게 되었다.

이화스랑에서의 첫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흐른다. 15명의 봉사단원이 유치부, 1, 2반에 5명씩 나눠서 들어갔다. 나는 보민언니, 단아언니, 시은언니, 지원이와 함께 초1반에 들어가게 됬다. 첫 수업을 한다는 설레임은 잠깐이었다. 우리와 아이들을 가로막은 수많은 장벽들을 헤쳐나아가야 했다. 수업진행이 우리가 생각했던 되로 되지 않고 자꾸 빗나갔다. 또한 아이들은 크메르어로 말해서 아이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없고 담임선생님이 영어를 할 줄 아셔서 담임선생님을 통해서만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무더운 날씨 또한 우리를 지치게 했다.

우리가 짰던 교육프로그램대로 진행을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유치부는 교육과정 중에 우리가 준비해간 것들의 일부를 이미 해본상태라 많은 수정이 필요했다. 또한 유치부는 초1, 2반과 함께 하려했던 프로그램을 따로 해야 했다. 1, 2는 영어 알파벳을 배웠다 해서 영어챈트수업을 준비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초1은 아직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 하셔서 영어챈트수업도 다른 대체 프로그램으로 교체해야했다. 오후에 매일매일 교장선생님과 회의를 해서 빼야 할 프로그램은 빼고 보완해야 할 부분은 보완해가면서 수업준비를 해나갔더니 우리의 수업은 첫날에 비해 점점 더 좋아졌다.

수업뿐만 아니라 아이들과의 소통도 나아졌다. 언어의 장벽에 대한 두려움은 잠깐이었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함께 뛰놀다 보니 서로 주고받는 눈빛과 웃음소리로도 우리는 교감을 하고 있었다. 크메르어가 생소하다 보니까 아이들이 이름을 말해줘도 못 알아 듣거나 자꾸 까먹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께 출석부에 있는 아이들 이름을 한명한명 불러 달라 부탁했고 한글로 쏙란, 쓰레이뺏, 쏙파란...’ 이런식으로 여자아이, 남자아이 구분해서 받아 적었다. 그 종이를 들고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이름을 물어보고 종이에서 찾아서 확인하는 방법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외워나갔다.

처음엔 부끄러워 이름을 물어봐도 작게 속삭이기만 했던 아이들이 아침에 우리를 보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수업시간엔 네악끄루!!네악끄루!!(선생님)’라고 외치며 자기가 그린 그림을 자랑한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의 치맛자락을 당겨서 뒤돌아보니 우리 반 여자아이가 두 팔을 벌린다. 서로 꼬옥 안아준다. 스쿨버스로 하교할 때는 버스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아침 8시부터 11시까지, 아이들과의 수업시간은 우리의 하루 중 가장 기대되고 밝고 활기찬 시간이었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현기증나게 만드는 살인적인 더위, 시골인 깜뽕스프에는 냉장고도 없어서 매일 미지근한 물을 먹었다. 유일하게 있는 선풍기 한 대는 내 쪽으로 바람이 오지 않았을 뿐더러 밤이면 정전으로 멈추기 일쑤였다. 덕분에 선풍기바람이 제일 잘 오는 혜진이 침대 맡은 우리의 쉼터가 되었다. 멈추지 않는 땀 덕분에 십 몇 년 만에 땀띠가 났다. 또한 물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땀으로 다 나와서 그런지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화장실은 정말 열악했다. 물이 안내려가기 일쑤였고 온갖 벌레들이 출몰했다. 캄보디아는 물이 귀한 나라였다. 우기라 오후 3~4시쯤이면 스콜이 내렸다. 빗물을 탱크에 모아 샤워를 했는데 빗물샤워는 정말 축복이었다. 우리가 캄보디아에 있는 동안 우기인데도 4일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우물물로 샤워를 해야 했다. 우물물이 그리 좋지 않아서 그 물로 양치를 했더니 잇몸이 부어서 양치를 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 아팠다. 4일 만에 비가오던 날 언니들과 뛰쳐나가서 내리는 비를 맞으며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현지 아이들은 비를 피해 처마 밑으로 숨는데 우리는 비를 맞으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더위 말고도 우리를 괴롭혔던 강적은 바로 벌레였다. 이화스랑에서의 첫 날 아무것도 모르고 불을 환하게 켜놓고 있다가 온 마을의 벌레가 우리의 숙소로 집합했다. 2층 침대에서 전등 바로 밑인 2층은 벌레폭탄을 맞았다. 그 후로 우린 시골 노부부처럼 해가 지는 8시면 자고 새벽 5시면 해가 뜨면 눈을 뜨는 생활을 시작했다. , 파리, 모기, 도마뱀, 이름 모를 벌레 떼들 그리고 밤마다 우리를 잠 못 들게 했던 수백 마리인지 수천마리인지 모를 개구리들의 합창. 하지만 우리도 점차 그런 환경에 적응해 갔다. 도마뱀의 등장에 놀라 소리를 지르던 우리가 털이 복슬복슬한 거대한 거미도 때려잡게 됐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봉사단 15명의 언니, 친구, 동생들과 함께 있어서 극복할 수 있었고 이러한 캄보디아의 환경들은 이화스랑을 추억하게 해주는 것들 중에 한 부분을 차지한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다른 언니, 친구들도 다들 눈이 빨개져 있거나 이미 펑펑 울고 있었다. 속에서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지나갔다.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꼈다. 이곳의 아이들은 늘 기도를 했다. 어꼰 네악끄루라고 하며 감사해했다. 난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이 아이들이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 나도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기도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 이 마음을 한국에서는 정말 잊고 살아왔다. 문명의 혜택을 당연시 여기며 받아왔던 우리에게 캄보디아가 안겨준 소중한 마음이다. 이젠 너무나 소중한 이화봉사단 15명의 언니, 동생, 친구들, 엄마같이 늘 우리를 챙겨주시고 즐겁게 해주신 설경옥 교수님과 옆에서 늘 우리를 지켜주신 송규동 선생님과 함께한 이화스랑에서의 1213일은 정말 소중한 추억이고, 소중한 인연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화스랑에서의 뜨거웠던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구불구불 하교버스에서 이어지고 이어지던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어꼰 네악끄루라며 맑은 눈을 반짝이던 아이들이 그립다.